[인터뷰] 김현종 중동아프리카 지역 변호사
소송 서류에서 오기(誤記) 찾아내 파기환송
재상고심 끝에 승소…현지 상업대리인 패소
“아랍도 변화 시작…불이익 참지 않아도 돼”
중동 국가에 물건을 수출하는 기업들엔 오래된 골칫거리가 있다. 현지 상업대리인을 선정하는 것이다. 유통 채널이 다양한 선진국들과는 달리, 중동 국가에서는 물건을 독점적 공급하는 상업대리인을 통해서만 팔 수가 있다. 현지 사업의 명운이 상업대리인에게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HD현대건설기계(당시 현대중공업)도 1985년 아랍에미리트(UAE)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현지 상업대리인을 선정했다. 이때부터 파트너가 된 알와짓 머시너리 트레이딩(알와짓)은 30년이 넘게 HD현대건설기계가 만든 제품을 판매해 왔다. 한때 매출 규모는 500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문제는 알와짓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시작됐다. 알와짓은 건설기계 판매 수익으로 부동산 사들였는데, 2008년 금융위기로 UAE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타격은 HD현대건설기계에 그대로 전해졌다. 알와짓이 물건 대금을 지급할 여력도, 마케팅 같은 매출 신장 노력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김현종 법무법인 지음 대표변호사.
HD현대건설기계는 2018년 결국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그러나 독점 사업권을 뺏기기 싫었던 알와짓은 해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회사는 UAE 현지에서 소송전에 돌입했다. UAE 법원은 1·2심과 파기환송심에서까지 알와짓 손을 들었지만, 작년 UAE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HD현대건설기계의 계약 해지가 정당하다고 봤다. 현지 대법원이 하급심에서 모두 패소한 외국기업의 손을 들어준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HD현대건설기계의 승소가 확정되면서 5년 넘게 멈춰있던 UAE사업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승소를 이끈 김현종(사법연수원 39기) 법무법인 지음 대표변호사는 “아랍 현지에서 독점적 지위에 있는 현지 회사를 상대로 승소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이 있었지만, HD현대건설기계의 경우 계약 해지를 주장할 만한 사유가 분명 있었다고 판단했기에 재상고심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소송을 계기로 HD현대건설기계가 다시 아랍에서 재기할 수 있게 돼 다행스럽고 뿌듯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현지 로펌이 패소한 사건 ‘역전승’…하급심 서류 훑어 오점 찾아내
김 변호사는 국내에 몇 없는 중동 아프리카 전문 변호사다. 사법연수원 시절 두바이 현지에서 진행된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중동 진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LG전자 중동아프리카 지역 법무팀장과 법무법인 태평양 두바이 사무소장을 역임한 그는 2017년 6월 중동아프리카 전문 로펌을 개업해 현재까지 중동 아프리카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UAE 현지 소송에서 쓰인 아랍어 소송 자료.
HD현대건설기계가 김 변호사를 찾은 건 UAE에서 1·2심을 모두 패소한 후였다. 회사는 하급심을 현지 대형로펌에 맡겼으나 속절없이 졌다. 현지에서 행정심판 단계를 대리했던 김 변호사는 상고심을 맡자마자 아랍어로 쓰여진 수만장의 소송 서류부터 살폈다. 패색이 짙은 판(版)을 뒤집을 만한 허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중 회사 사명이 ‘HD현대건설기계’가 아니라 ‘HD현대중공업’으로 잘못 기재됐다는 점을 발견했다. HD현대건설기계는 현대중공업에서 분사된 후로 독립적인 사명을 가진 기업이 됐지만, 소송 서류에는 여전히 이전 사명이 기재된 것이다. 김 변호사는 소송 당사자를 현대중공업으로 놓고 진행된 그간의 소송이 잘못됐다고 주장했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결정했다.
파기환송심에서 HD현대건설기계는 또다시 패소했지만, 김 변호사는 기업을 설득해 재상고심을 이어갔다. 재상고 이유로는 재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감정인 보고서가 잘못됐다는 점을 들었다. 사실 판단만 해야 하는 감정인이 법리 판단까지 하는 등 권한을 벗어나 보고서를 작성했고, 당사자 기재도 완전히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피력했다. 대법원 재상고를 인용하고 파기 자판(대법원 재판부에서 직접 심리를 하는 것)을 열었다. UAE 민사소송법상 대법원에서 같은 이유로 원심을 두 번 파기할 때는 재판부가 직접 처음부터 사건을 심리할 수 있다.
UAE 대법원 재판부와 새로운 감정인이 사건을 처음부터 심리한 결과, HD현대건설기계의 계약 해지는 적법하다는 확정 판결이 나왔다. 김 변호사는 장기 미수금 문제 등 상업대리인이 저지른 여러 위반 사항이 수습됐다고 치더라도, 경쟁업체와 거래를 한 사실은 ‘독점 거래’라는 계약의 본질을 어긴 중대한 위반 사항이라는 점을 피력했다. 대법원도 이 주장을 받아들여, 둘 간의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당시 재판부는 “최소한 경쟁업체 거래 금지 의무는 지켰어야 했다”며 HD현대건설기계의 손을 들었다.
UAE 대법원 판단으로 HD현대건설기계는 새로운 상업대리인을 선정할 수 있게 됐다. HD현대건설기계 측은 지난해 말 새로운 상업대리인인 알 시라위 기계와 장비 판매 계약을 맺었다며 5년 반 만에 사업 재개를 알린 바 있다.
“중동도 변화하기 시작…현지 분쟁도 겁낼 필요 없어”
김 변호사는 이번 사건을 맡으면서 중동 지역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중 하나가 상업대리인법의 변화다. UAE의 상업대리인법은 지난 2022년 대대적인 개편 작업을 거쳐 지난해 6월부터 새롭게 시행됐다.
김 변호사는 “이전까지는 상업대리인법이 현지 유력자인 상업대리인의 권한을 보호해 주기 바빴다면, 이제는 해외기업이 계약 해지를 조금 더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고, 상품 판로도 다양화할 수 있도록 법도 변화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HD현대건설기계 사건에서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이런 변화가 중동 패권을 두고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경쟁이 치열해진 탓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중동 패권을 두고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해외기업의 유출을 막는 것도 국가 경쟁력이 된 상황”이라며 “이제는 우리 기업을 지키는 게 중동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 됐다”고 했다.
이어 그는 “우리 기업도 예전처럼 현지에서 당하는 불이익이나 분쟁 등을 참거나 겁낼 필요가 없다”며 “중동 지역에서도 행정심판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내는 등 적극적 조치를 취해서 기업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상황을 전했다.
소송 서류에서 오기(誤記) 찾아내 파기환송
재상고심 끝에 승소…현지 상업대리인 패소
“아랍도 변화 시작…불이익 참지 않아도 돼”
중동 국가에 물건을 수출하는 기업들엔 오래된 골칫거리가 있다. 현지 상업대리인을 선정하는 것이다. 유통 채널이 다양한 선진국들과는 달리, 중동 국가에서는 물건을 독점적 공급하는 상업대리인을 통해서만 팔 수가 있다. 현지 사업의 명운이 상업대리인에게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HD현대건설기계(당시 현대중공업)도 1985년 아랍에미리트(UAE)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현지 상업대리인을 선정했다. 이때부터 파트너가 된 알와짓 머시너리 트레이딩(알와짓)은 30년이 넘게 HD현대건설기계가 만든 제품을 판매해 왔다. 한때 매출 규모는 500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문제는 알와짓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시작됐다. 알와짓은 건설기계 판매 수익으로 부동산 사들였는데, 2008년 금융위기로 UAE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자 직격탄을 맞게 된 것이다. 타격은 HD현대건설기계에 그대로 전해졌다. 알와짓이 물건 대금을 지급할 여력도, 마케팅 같은 매출 신장 노력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김현종 법무법인 지음 대표변호사.
HD현대건설기계는 2018년 결국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그러나 독점 사업권을 뺏기기 싫었던 알와짓은 해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두 회사는 UAE 현지에서 소송전에 돌입했다. UAE 법원은 1·2심과 파기환송심에서까지 알와짓 손을 들었지만, 작년 UAE 대법원은 재상고심에서 HD현대건설기계의 계약 해지가 정당하다고 봤다. 현지 대법원이 하급심에서 모두 패소한 외국기업의 손을 들어준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HD현대건설기계의 승소가 확정되면서 5년 넘게 멈춰있던 UAE사업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승소를 이끈 김현종(사법연수원 39기) 법무법인 지음 대표변호사는 “아랍 현지에서 독점적 지위에 있는 현지 회사를 상대로 승소하는 것이 가능할까 의문이 있었지만, HD현대건설기계의 경우 계약 해지를 주장할 만한 사유가 분명 있었다고 판단했기에 재상고심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소송을 계기로 HD현대건설기계가 다시 아랍에서 재기할 수 있게 돼 다행스럽고 뿌듯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현지 로펌이 패소한 사건 ‘역전승’…하급심 서류 훑어 오점 찾아내
김 변호사는 국내에 몇 없는 중동 아프리카 전문 변호사다. 사법연수원 시절 두바이 현지에서 진행된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중동 진출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LG전자 중동아프리카 지역 법무팀장과 법무법인 태평양 두바이 사무소장을 역임한 그는 2017년 6월 중동아프리카 전문 로펌을 개업해 현재까지 중동 아프리카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UAE 현지 소송에서 쓰인 아랍어 소송 자료.
HD현대건설기계가 김 변호사를 찾은 건 UAE에서 1·2심을 모두 패소한 후였다. 회사는 하급심을 현지 대형로펌에 맡겼으나 속절없이 졌다. 현지에서 행정심판 단계를 대리했던 김 변호사는 상고심을 맡자마자 아랍어로 쓰여진 수만장의 소송 서류부터 살폈다. 패색이 짙은 판(版)을 뒤집을 만한 허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중 회사 사명이 ‘HD현대건설기계’가 아니라 ‘HD현대중공업’으로 잘못 기재됐다는 점을 발견했다. HD현대건설기계는 현대중공업에서 분사된 후로 독립적인 사명을 가진 기업이 됐지만, 소송 서류에는 여전히 이전 사명이 기재된 것이다. 김 변호사는 소송 당사자를 현대중공업으로 놓고 진행된 그간의 소송이 잘못됐다고 주장했고, 대법원도 이를 받아들여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결정했다.
파기환송심에서 HD현대건설기계는 또다시 패소했지만, 김 변호사는 기업을 설득해 재상고심을 이어갔다. 재상고 이유로는 재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감정인 보고서가 잘못됐다는 점을 들었다. 사실 판단만 해야 하는 감정인이 법리 판단까지 하는 등 권한을 벗어나 보고서를 작성했고, 당사자 기재도 완전히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을 피력했다. 대법원 재상고를 인용하고 파기 자판(대법원 재판부에서 직접 심리를 하는 것)을 열었다. UAE 민사소송법상 대법원에서 같은 이유로 원심을 두 번 파기할 때는 재판부가 직접 처음부터 사건을 심리할 수 있다.
UAE 대법원 재판부와 새로운 감정인이 사건을 처음부터 심리한 결과, HD현대건설기계의 계약 해지는 적법하다는 확정 판결이 나왔다. 김 변호사는 장기 미수금 문제 등 상업대리인이 저지른 여러 위반 사항이 수습됐다고 치더라도, 경쟁업체와 거래를 한 사실은 ‘독점 거래’라는 계약의 본질을 어긴 중대한 위반 사항이라는 점을 피력했다. 대법원도 이 주장을 받아들여, 둘 간의 계약을 해지하는 것이 옳다고 봤다. 당시 재판부는 “최소한 경쟁업체 거래 금지 의무는 지켰어야 했다”며 HD현대건설기계의 손을 들었다.
UAE 대법원 판단으로 HD현대건설기계는 새로운 상업대리인을 선정할 수 있게 됐다. HD현대건설기계 측은 지난해 말 새로운 상업대리인인 알 시라위 기계와 장비 판매 계약을 맺었다며 5년 반 만에 사업 재개를 알린 바 있다.
“중동도 변화하기 시작…현지 분쟁도 겁낼 필요 없어”
김 변호사는 이번 사건을 맡으면서 중동 지역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중 하나가 상업대리인법의 변화다. UAE의 상업대리인법은 지난 2022년 대대적인 개편 작업을 거쳐 지난해 6월부터 새롭게 시행됐다.
김 변호사는 “이전까지는 상업대리인법이 현지 유력자인 상업대리인의 권한을 보호해 주기 바빴다면, 이제는 해외기업이 계약 해지를 조금 더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고, 상품 판로도 다양화할 수 있도록 법도 변화하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HD현대건설기계 사건에서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이런 변화가 중동 패권을 두고 사우디아라비아와 UAE의 경쟁이 치열해진 탓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중동 패권을 두고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해외기업의 유출을 막는 것도 국가 경쟁력이 된 상황”이라며 “이제는 우리 기업을 지키는 게 중동 국가의 중요한 역할이 됐다”고 했다.
이어 그는 “우리 기업도 예전처럼 현지에서 당하는 불이익이나 분쟁 등을 참거나 겁낼 필요가 없다”며 “중동 지역에서도 행정심판을 제기하거나 소송을 내는 등 적극적 조치를 취해서 기업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상황을 전했다.